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엔비엔푸 전투 (문단 편집) === 프랑스군의 패인 ===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 > 디엔비엔푸 p.452~453 > 포로수용소에서 우린 베트민 전사들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직면했다. 그리고 우린 프랑스의 장군과 지휘관들이 혁명이 뭔지 전혀 모른 채 무려 8년 동안이나 혁명에 맞서 싸워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디엔비엔푸의 패배는 우연히 직면하게 된 운명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내려진 준엄한 심판이었다. >---- > David Halberstam, Ho,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7, p.4. 위의 인용문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을 총 지휘한 보응우옌잡 장군이 자서전에 쓴 내용이다. 프랑스군은 항불전쟁을 거치며, 정규군 수준으로 성장한 베트민을 과소평가했으며 그 결과 패배했다. 프랑스가 전쟁에서 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도를 넘은 [[교만]]과 적에 대한 괄시'''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 해에 치른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C3%A0_S%E1%BA%A3n|나산 전투]]의 승리를 통해 베트민군을 얕잡아보기 시작했고 전투에서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나산 전투의 전술이 베트남 어디서든 통할 것이라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후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Muong_Khoua|무앙쿠아 전투]]에서 칼을 갈고 나온 베트민군에게 무참히 참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여전히 베트민군을 보급도 개판인 열악한 군대로 깔보고 있었으며 포병 전력을 늘려야 한다는 총지휘관 카스트리 장군의 말에 가브리엘 요새의 지휘관 샤를 피로는 "베트민군이 아무리 많은 포를 배치하더라도 현재 전개된 전력만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라고 그의 의견을 묵살했다. 심지어 베트민군 사단들이 디엔비엔푸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으나 이 또한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시로 정찰을 보낸 수색대는 '''몰살되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역시 프랑스군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열악하다고 무시한 베트민군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고 대포를 분해해 인력으로 옮기고 보급을 민간인들에게 맡기는 등 그들의 역량을 총동원해 오만방자한 프랑스군을 베트남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 '''부족한 전쟁의 대의명분과 허점투성이었던 카스토르 작전''' 베트민군은 '''독립'''이라는 충분한 대의명분 하에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얻으며 전쟁에 돌입한 반면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부터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전쟁을 감행하고 있다는 자국과 국제적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앙쿠아 전투의 참패는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고 프랑스는 빠르게 여론을 돌리기 위해 전쟁을 끝내는 대신 지휘부를 교체하는 악수를 두었다. 앙리 나바르 장군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 요새화 작업에 들어갔으나 상술한 대로 공수된 콘크리트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사령부를 제외한 외곽 기지의 벙커들은 토사, 목재, 얇은 철판 등 취약하기 그지없는 재료들을 이용해야 했으며 당연히 이렇게 부실한 벙커들은 베트민의 포격 앞에 날아갔다. 공수된 곡사포, 박격포 등 기타 전력 역시 베트민군에 비해 크게 부족했으며, 그나마도 베트민군의 포격이 계속되며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 '''복잡한 인적구성과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체계''' >어느 누가 바오다이 황제를 위해 죽음을 택할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가? 어느 병사가 미국에 의해 지원받고, 프랑스군에게 훈련받는 대지주와 바오다이의 군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싸우려 하겠는가? >---- >The Vietnam Wars 1945-1990 p.36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곳곳에서 현지인 식민지 부대를 편성하여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문제는 디엔비엔푸에 투입된 이들의 출신지는 알제리, 모로코, 타이족, 반공주의 성향의 친불 베트남인 등 다양해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의사소통도 안 되는 마당에 단결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거기다 대다수 베트남인들 입장에선 프랑스에 협력하는 반공 베트남인들은 식민지 부역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안마리에서는 베트민군의 선동에 넘어간 타이족 병사들이 전원 탈영하는 기가 막힌 일도 벌어졌다. 여기에 디엔비엔푸 요새의 총지휘관 카스트리 대령은 기병 출신으로 애초에 방어전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가 지휘해야 하는 부대는 기병부대가 아니라 공수부대와 포병부대였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당신이 공수부대에 대해 뭘 알아?"라는 태도로 일방적으로 카스트리의 명령을 무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스트리가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